영화

죽음의 궤도에서, 살아갈 이유를 찾다. 《프로젝트 헤일메리》가 우주 SF의 공식을 거부하는 법

**스포주의**


우주에 혼자 남겨진 인간의 이야기를 우리는 이미 안다.

마크 와트니는 감자를 심었지만 폭발했고,
쿠퍼는 딸의 책장 뒤에서 무력감에 절규했고,
라이언 스톤은 산소가 떨어지는 헬멧 안에서 체념했다.

무겁고, 무섭고, 차갑게 느껴진다.
우주는 원래 그런 곳이니까.
인간이 감당하기엔 너무 크고, 너무 멀고, 너무 차가운 곳

자살 미션인데, 유쾌하고 재밌다.

헤일메리 호는 편도 티켓이다.
돌아올 연료도, 계획도, 의지도 없는 배에 실려 보내진 남자.
그것도 자원이 아니라 강제로.

이 설정만 놓고 보면 《인터스텔라》보다 어두워야 정상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무게를 내려놓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레이스가 기억을 되찾아가는 구조 자체가 “나는 왜 여기 있는가”를 천천히 밝혀가는 미스터리이지, “나는 곧 죽는다”를 곱씹는 비극이 아니다. 카메라는 이미 죽은 사람을 비추되, 감정을 쌓지 않는다. 슬픔이 머물 겨를 없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연출적으로 유머를 잘 짜낸 것도 한 몫 했으리라.

같은 “고립된 우주” 장르에서 《그래비티》는 침묵으로 공포를 만들었고, 《인터스텔라》는 시간의 잔인함으로 압도감을 주었고, 《마션》은 유머를 섞긴 했지만 본질은 조난 생존기였다. 세 영화 모두 “어떻게 살아 돌아가느냐”가 핵심이었다. 헤일메리는 묻는 질문 자체가 다르다. 돌아가는 게 아니라, 어디에 남을 것인가.

귀환을 포기하는 장면이 슬프지 않은 이유

클라이맥스에서 그레이스는 선택한다.
타우메바를 지구로 보내고, 자신은 로키와 함께 에리드로 간다.

지구를 포기한다.
집을 포기한다.
인류 영웅이 될 기회를 포기한다.

중학교 과학 선생님.
죽기 싫어서 미션을 거부했던 평범한 사람.

이 남자에게 “인류를 구한 영웅으로 귀환”하는 건 애초에 어울리지 않는 옷이다.
에리드에서 에리디안 아이들에게 과학을 가르치는 마지막 장면. 그게 이 남자의 본질이다.

지구에서도 선생님이었고, 13광년 떨어진 별에서도 선생님이다.
장소가 바뀌었을 뿐 삶은 이어지고 있다.
그레이스는 죽음을 받아들인 게 아니다. 삶의 주소를 옮긴 것이다.

우주와 인간, 보잘것 없음의 무력감에 맞서다

우주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는 대개 인간의 나약함을 증명하는 데 쓰인다.
그 압도적인 무게감을 장치 삼아 다양한 감정을 쏟아내게 한다.

헤일메리는 우주의 크기를 줄이지 않으면서도 인간을 작아지게 놔두지 않았고,
그래서 관객이 웃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죽음의 궤도에서 진정으로 내가 있을 곳을 결정할 수 있을까?